이탈리아 경제는 숫자만 보면 꽤 괜찮아 보인다. 팬데믹 이후 GDP 성장률은 빠르게 회복됐고, 실업률도 다소 안정세에 들어섰다. 유럽연합(EU)의 막대한 회복기금까지 받으며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도 회복력이 강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성장률을 실제로 체감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로마나 밀라노의 번화가에서는 소비가 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중소도시나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자영업자는 여전히 비용 부담에 시달리고, 청년층은 여전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다른 나라로의 이주를 고민하고 있다. 통계는 회복을 말하지만, 거리의 공기는 아직 낙관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현지 언론에서는 “성장은 했지만 그 성장이 누구의 것이냐”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데이터는 일부 대기업과 수출 산업을 중심으로 반등했지만, 서민 경제와 지역 소상공인에게 그 효과는 체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장률은 일시적 반등일 뿐일까? 구조의 벽은 여전하다
2021년, 이탈리아의 경제는 6%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유럽 국가 중에서도 가장 빠른 회복세였다. 팬데믹으로 타격받았던 관광업이 다시 살아나고, 독일·프랑스와 긴밀하게 연결된 제조업 부문도 공급망이 복원되며 회복세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성장세는 다시 둔화됐다. 2023년에는 1.2%, 2024년엔 1%에도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빠른 반등 이후 다시 주춤한 것이다. 문제는 이 회복세가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경기 반등과 일시적 정책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구조적 문제는 오랜 시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낮은 노동생산성, 청년 실업, 경직된 노동시장, 복잡한 행정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고령화. 이 모든 문제는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로막는 벽처럼 버티고 있다.
특히 청년 고용 문제는 심각하다. 유럽 평균보다 2배 가까운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고,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계약직이나 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독일이나 북유럽, 혹은 미국으로 떠나고, 이탈리아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EU 회복기금, 정말 체질을 바꿀 수 있을까
이탈리아가 유럽의 시선을 끌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EU 회복기금의 최대 수혜국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넥스트 제너레이션 EU’라는 이름으로 유럽연합이 마련한 7,500억 유로 규모의 회복기금 중 이탈리아는 약 1,910억 유로를 배정받았다. 이탈리아 GDP의 10%를 훌쩍 넘는 규모다.
정부는 이 기금을 바탕으로 디지털 인프라, 친환경 에너지, 교육, 공공행정 개혁 등 다양한 부문에 투자하고 있다. 이미 전국 곳곳에서 도로와 철도, 공공건물이 새롭게 바뀌고 있고, 행정시스템도 종이문서에서 디지털 기반으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이 회복기금은 ‘기회’일 뿐 ‘보장’은 아니라는 것. 실제로 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계획에 맞게 집행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탈리아는 정치적 불안정과 느린 행정 프로세스, 복잡한 예산 승인 절차로 유명하다. 정권이 자주 바뀌다 보니 정책의 연속성도 담보되기 어렵다.
게다가 이 기금이 중장기적 성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민간의 투자와 혁신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소기업의 디지털화 수준은 낮고, 창업 생태계도 유럽 내에서 뒤처져 있다. 단순히 돈을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체질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국가부채와 고령화, 이탈리아 경제의 진짜 변수
이탈리아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국가부채'다. 현재 이탈리아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140%를 넘어섰다. 이는 유로존에서 그리스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저금리 시대엔 괜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국면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부채 상환 부담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국가 재정이 흔들리면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채권금리가 오르며 민간 투자심리에도 영향을 준다. 이미 몇몇 신용평가사는 이탈리아의 재정 건전성에 대해 경고음을 내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정치적 불확실성과 더불어 재정 리스크를 가장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인구 구조다. 이탈리아는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에 속하고, 노동연령 인구는 빠르게 줄고 있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연금과 의료 등 복지 예산의 압박도 점점 커지고 있다. 젊은 인구가 줄면 내수도 줄고, 생산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래의 성장 동력을 잃는다는 뜻이다.
결론: 성장률보다 중요한 건 ‘흐름의 방향’
이탈리아는 지금 분명히 변화 중이다. 과거보다 낫고, 회복의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회복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성장률이 잠시 올랐다고 해서 낙관할 수 없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그 반등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진짜 변화는 숫자가 아니라 현장의 숨결에서 느껴져야 한다. 중소기업이 살아나고, 청년이 희망을 느끼고, 행정이 빨라지고, 민간의 창의가 움직일 때 비로소 이탈리아는 ‘성장률 이상’의 나라가 될 수 있다.
지금 이탈리아는 그 갈림길 위에 서 있다. 반등에서 전환으로, 회복에서 진짜 성장으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라, 정책의 일관성, 사회적 합의, 그리고 실행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