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전략에서 인도는 오랫동안 ‘잠재성 있는 시장’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실제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일부 대기업은 비교적 일찍 인도에 생산기지를 세우고 내수 시장을 공략해 왔다. 그러나 2024년 현재, 인도에 대한 시선은 이전과 다르다. 단순히 ‘크다’는 이유가 아닌, ‘크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공급망의 축이 바뀌고 있는 지금, 인도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전략 거점으로 다가온다.
대기업에서 중견·중소기업으로 확산되는 진출 흐름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인도 진출 초기부터 ‘현지 공장 + 현지화 제품 전략’을 꾸준히 밀어붙였다. 노이다에 위치한 삼성의 스마트폰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로, 단순 조립을 넘어서 인도 소비자 맞춤형 모델을 생산하고 있다. LG전자는 북인도 중심으로 냉장고, 세탁기 등 수요가 높은 제품군을 생산하며 안정적인 입지를 확보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현대차와 기아의 진출이 눈에 띈다. 첸나이에 공장을 둔 현대차는 현재 인도 승용차 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아는 2019년 진출 후 4년 만에 점유율 6% 이상을 기록했다. 이들 기업은 인도 소비자의 취향과 주행 조건에 맞는 모델을 별도로 개발하고 있으며, 단순한 수출형 구조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이러한 선도 사례들이 구축되자 중견기업과 중소기업들도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전자부품, 금형, 식품, 뷰티, 생활용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도를 단순 유통 시장이 아닌 생산 및 R&D의 거점으로 바라보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일부 스타트업은 현지 플랫폼이나 물류 인프라와 협업해 시장 테스트를 진행 중이며, KOTRA 및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등 정부 기관의 지원도 이 흐름에 기여하고 있다.
인도시장, 단순하지 않은 구조적 특성과 접근 방식
인도는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거대한 시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층적 구조를 가진 복합시장이다. 28개 주와 8개의 연방 직할지로 나뉘며, 각 주마다 언어, 종교, 정치 성향, 경제 수준, 행정 절차가 모두 다르다. 델리의 소비 성향과 첸나이의 제품 선호도는 다르며, 북인도와 남인도는 유통 채널부터 광고 메시지까지 달라져야 한다.
한국 기업이 인도에 진출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장벽은 복잡한 행정 시스템이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 허용 범위는 업종마다 다르며, 절차 또한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사업자 등록, 통관, 세무 관련 행정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린다. 현지 회계법인이나 로펌과의 협업은 사실상 필수에 가깝고, 이를 생략한 경우 사업 지연 사례가 다수 보고된다.
인도 소비자에 대한 이해도 필수다. ‘가성비’를 중시한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오해다. 가격에 민감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품질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브랜드 인지도와 A/S 인프라, 후기 기반 신뢰도 등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대도시와 농촌 지역의 구매력 격차가 크고, 온라인 쇼핑의 확산 속도도 지역별로 다르기 때문에 판매 채널 전략도 정교해야 한다.
2025년, 전환점이 되는 해
2025년은 여러모로 인도 시장 공략의 전환점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이다. 미·중 갈등, 중국 리스크에 대한 대응으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구사하는 가운데, 인도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 육성 정책 ‘Make in India’는 단지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세제 혜택, 토지 제공, 인허가 간소화 등 실질적 유인책으로 작동 중이다.
현대차는 인도 내 전기차 생산 확대를 공식화했으며, 배터리 관련 부품사들도 연쇄적으로 진입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포스코인터내셔널, 효성 등 소재·인프라 분야의 기업들도 점진적으로 기반을 넓히는 중이다. 이들은 단순 제조를 넘어 현지 부품 공급망까지 구축하려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한-인도 CEPA(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의 개정 움직임이다. 2010년에 체결된 CEPA는 관세 인하와 시장 개방에 일정한 성과를 냈으나, 실질적인 비즈니스 여건을 크게 개선하진 못했다. 이번 개정을 통해 투자자 보호, 원산지 기준 완화, 수입 허용 품목 확대 등이 논의되고 있으며, 이는 한국 기업의 진출 환경 개선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도는 이제 단순한 제조기지 그 이상이다. 전자상거래, 핀테크, 온라인 교육 등 디지털 경제의 성장이 눈에 띄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IT, 플랫폼, 콘텐츠 기업들에게도 기회가 열리고 있다. CJ ENM, 넷마블, 토스 등도 장기적으로 인도 시장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도 있다.
단기 수익보다 장기 관점이 중요한 시장
한국 기업에게 인도는 도전과 기회가 공존하는 시장이다. 규모나 성장률만을 보고 접근했다가 문화적, 제도적 복잡성에 부딪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선도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결국 중요한 것은 현지에 대한 이해, 장기적인 전략, 유연한 조정력이다.
인도는 단기 성과를 내기 어려운 시장일 수 있다. 그러나 준비된 기업에게는 분명한 보상을 주는 시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진출’이 화두였다면, 앞으로는 ‘정착’과 ‘확장’이 핵심이 될 것이다. 인도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접근이 더욱 전략적이고 입체적으로 진화하길 기대한다.